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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인 기독교로서 구세군의 역사

구세군서울지방본영 2020. 5. 22. 14:03

 ◉ 도입

처음 ‘구세군’을 접한 곳은 12월 길거리에서 사랑의 종을 울리며 모금을 하는 자선냄비이거나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복지시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군은 기독교의 한 교파이며, 구세군이 자선냄비를 하거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000님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출석하는 구세군 000 영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기독교의 한 교회와 전혀 다름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구세군에 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질문

1. 평소에 ‘구세군’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2. 000님이 000 영문에 출석하기를 권유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 전개

1. 구세군의 기원

구세군의 창립자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더린 부스(Catherine Booth)입니다.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는 1865년 런던 동부의 슬럼가에서 기독교 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스 부부는 산업혁명의 여파에 밀려 도시로 몰려든 빈곤층 사람들과 근로자들이 교회로부터 배척되던 시절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감리교를 탈퇴하고 그를 따르는 목사와 평신도들과 함께 길거리에서부터 복음전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감리교 부흥사로 뛰어난 활약을 하던 윌리엄 부스 목사는 런던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전도대회를 해서 빈곤층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지만, 그들은 교회의 차별 때문에 정착을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던 차에 기독교 선교회를 조직하여 교회 중심 세력에게 환영받지 못하던 빈곤층, 노숙인, 중독자들을 기독교 선교회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구세군에서 포용했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부스 부부의 소외계층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단지 영적인 측면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실업자가 된 도시 이주민들의 참상을 알게 되며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현실의 변화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세군은 하나님을 말씀인 복음을 통한 영적인 사역과 함께 음식을 나눠주고, 쉴 곳을 제공하며, 갈 곳이 없는 노숙인과 성매매여성과 장애인들을 위한 숙박시설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복지프로그램들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890년대 초에 부스는 영국을 사회적 불행으로부터 건져낼 야심적이고 거대한 계획을 담은 『최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책에 담은 계획대로 부스는 구세군을 통해 수천 명의 실직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노동(인력)교환 서비스센터를 개설하여 직업을 연결해 주었고, 매년 런던에서 9천여 명의 사람들이 실종되는 것을 발견하고 실종자 찾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스와 구세군은 사회의 낙오자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공정한 노동과 쾌적한 환경이 주어질 수 있는 농장 거주지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부스는 빈곤층을 위한 은행 건립을 원했고, 법적으로 도움을 제공해 주면서 대규모의 이민사업안을 구상했습니다. 부스 부부와 초창기 구세군을 설립한 이들은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구호를 실천해 왔으며, 현재 구세군은 전 세계 131개 국가에서 네트워크로 사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1929. 4. 1~1912. 8.20)

1) 성장 배경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829년 4월 10일 영국 노팅험(Nottingham)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55년 6월에 캐더린 멈포드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9명의 자녀를 뒀습니다.

부스의 유년 시절을 보면 그가 빈곤층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4세에 아버지을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일했습니다. 비록 전당포에서의 상거래 방법이 싫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6년간 전당포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당포 업자로서 그가 매일 보는 일상은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처절한 삶이었고, 그러한 삶에 대한 동정심이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충동적인 십대였던 윌리엄은 15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노팅험의 웨슬리교 채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스는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국 도시 빈민들을 돕고자 하는 열정이 그의 가슴에 불타게 되었고, 이 열정은 그의 삶 전반을 이끄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비록 10대였지만 선교에 대한 부스의 재능은 탁월했습니다. 빈곤층에 대한 관심으로 그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부스는 복음전도사로서 감리교에서 전일제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부흥전도자로서 윌리엄 부스

윌리엄 부스는 1852년 11월 감리교 개혁파의 스폴딩 교구로 초청을 받아 15개월간 전도자로 사역하며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리교 신파 연회에서 부목사로 추천받아 스태포드샤이어 지방에서 특별 전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크게 성공을 거둠으로 감리교 연회는 윌리엄 부스에게 교단 전체를 위한 복음전도사의 일을 맡깁니다.

스물일곱 살의 윌리엄 부스가 각 지방의 초청을 받아 순회전도를 하며 크게 성공을 거두자 감리교 신파의 유력한 사람 중에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857년에 노팅험에서 열린 연회에서는 소요경비 과다와 젊은 윌리엄이 여러 지방에서 영향력이 커졌다는 이유를 들어 순회전도사 직을 해임해 버립니다.

이 결정에 윌리엄은 순종하고 핼리팩스 교회를 맡아 담임하면서 다시 순회전도자로 임명되기를 기다렸지만 연회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1861년 리버풀에서 열린 감리교 신파 연회에서조차 윌리엄 부스의 순회전도자 임명이 어려워지자 윌리엄 부스와 캐더린 부스는 평소 품었던 순회전도자로서의 사역을 위해 1861년 7월 8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감리교를 떠납니다.

3) 기독교 선교회에서의 활동

이후 윌리엄 부스와 캐더린 부스는 거리의 전도자가 되어 군소전도단을 통합하여 동부런던 기독교 부흥회(The East London Christian Revival Society)를 조직하였으며, 후에 구세군의 전신인 기독교선교회(Christian Mission)로 변칭을 변경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선교회는 주로 천막을 짓고 천막에서 집회를 갖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교파들은 겨울에는 가로전도 없이 옥내 집회만을 열고 있었지만 기독교 선교회는 연중 가로전도와 옥내집회를 개최함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독교 선교회의 주 활동지가 런던 동부의 빈민가였습니다. 그곳은 악덕업자, 빈곤, 무지, 재난 등사회의 밑바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가난했고, 그들을 위해 집회를 열만한 장소가 마땅하지 않아서 마굿간, 극장 홀, 상점 등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선교회의 역할은 전도해서 구원 받은 사람들을 기존교회로 보내는 선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기존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자 그 사람들을 위해 차츰 교회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어 3년 후에는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13개의 장소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선교회에서 윌리엄 부스와 회원들은 성서, 전도지, 책자 등을 전도용으로 팔았고 부인회, 성경반, 야학 등을 실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일학교 및 주간학교도 세웠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작은 저축은행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도 힘썼습니다. 복음 전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실시하는 기독교선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선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해 갔습니다.

4) 구세군의 창설

윌리엄 부스와 아내 캐더린 부스가 이끈 기독교 선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1878년에 창립 1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목회자가 36명에 이르렀고, 전도방식도 초보적이고 구전 방식에서 이제는 여러 곳에 건물을 구입하게 되었고, 그 곳에 목회자를 파견하는 단체로 발전했습니다.

기독교선교회가 성장하면서 운영체계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윌리엄 부스는 1878년 사관 총회를 앞두고 ‘기독교 선교회’ 보다는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으로 명칭을 변경할 의사를 밝히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가장 튼튼한 군대 조직을 차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로서 거듭나기 위해 모든 제도를 준군대식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의견에 모두가 찬성을 했고, 그 해 7월 2일 공식적으로 기독교 선교회는 ‘구세군’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구세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구세군 교리문’도 제정하게 되었고, 1880년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 군복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계급과 군기도 제작하여 하나님의 영적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5) 구세군 사역의 확장

기독교선교회(Christian Mission)를 구세군(The Salvation Army)으로 개칭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준군대식 조직을 갖추자 온 세계를 향한 복음전도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유럽을 비롯해서 미주 대륙, 호주,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구세군이 개전되기 시작했고, 1908년에는 한국에도 구세군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구세군을 창립 한 후 세계로 선교의 폭을 넓혀 갔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순회하는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는 "가라! 영혼에게로, 극악한 자에게로"(막15:15) 라는 말을 자주 하며 세계 선교를 강조했고,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원이요 비전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세계 선교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창립자의 정신이 계승되어 오늘날 전 세계 128개국에서 구세군의 선교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6)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소천

1912년 4월 10일 윌리엄 부스의 83회 생일 날 런던 시내에서 천여 명의 사관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이 집회를 끝으로 윌리엄 부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마쳐야만 했습니다. 세계 선교와 사회개혁, 그리고 빈곤층을 돌보는 일에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인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백내장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악화되어 실명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어 생애의 불이 꺼져가는 상황에도 그의 마음은 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탁에 나온 계란을 만지작거리며 “많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나만 계란을 먹을 수 있겠느냐?”며 굶주리고 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걱정했다는 일화는 윌리엄 부스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빈곤층 선교에 힘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류의 구원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교에 평생을 불태웠던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윌리엄 부스는 1912년 8월 20일 8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3. 구세군의 한국 선교

1) 구세군 조선 선교의 역사

한국에 구세군이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07년 윌리엄 부스 대장이 40일간의 일본 순회선교 중 구세군을 통하여 조선사회의 개혁을 원했던 무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윌리엄 부스를 만나 조선에도 구세군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에 돌아간 윌리엄 부스는 1908년 10월 호가드(Robert Hoggard, 1861~1935년, 한국명 허가두) 사관과 그의 부인 애니 존스(Annie Johns, 1862~1941년)사관을 조선에 파송함으로 구세구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세군이 조선에 선교된 1908년의 시대적 상황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 망국의 기운이 감도는 때였기에 새로운 소망을 찾는 조선인들에게 구세군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강대국이 파견한 군대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오해로 선교초기부터 큰 관심을 끌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 허가두 사관을 비롯한 구세군 개척단이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군대’라는 구세군의 정체성을 따라 헌신적으로 조선 선교에 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개척사관 허가두와 그의 부인 애니 존스가 한국을 떠나는 1916년에는 구세군 교회 78개와 사관 87명, 그리고 교인 4,800여명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한국구세군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2) 초기 구세군의 사역

구세군은 선교초기부터 복음을 통한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민중계몽, 소외계층의 돌봄, 여성의 지위 향상, 시대적 상황에 따른 사회구원에 큰 관심을 보여 왔습니다. 복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영혼구원에 힘썼고, 1909년부터 발간된 『구세신문(오늘날 구세공보)』으로 구세군의 내부 소식과 함께 해외 소식이 실려 해외 정보 루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구세신문에는 농사법, 여성교육, 가정생활 등 다양한 기사를 실어 마땅히 읽을거리가 없고 교육방법과 정보가 제한돼 있었던 암울한 시대에 민중계몽과 사회개혁으로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제에 의해 나라가 패망함으로 자포자기 가운데 술과 퇴페문화로 세월을 낭비하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1921년부터 『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금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금주운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술과 퇴페문화, 가정파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운동은 현재‘건전생활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3월에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구세군은 개척 초기부터 빈민을 위한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힘써 왔습니다. 1918년에는 추운 날씨에 고통당하는 빈민들의 긴급구호를 목적으로 ‘급식소’및‘장작배급소’를 시작하였으며, 부모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구세군 후생학원(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아동수용시설은 현재까지 서울, 군산, 대구, 대전 등지에서 부모 없이 자라나는 아동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1920년대 후반 조선 사회의 어려움과 일제의 곡물수탈로 피폐해진 국민이 늘어가고, 도시 빈민이 증가하자, 구세군은 빈민구제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자선냄비 모금운동’을 도입하여 1928년부터 실시했습니다. 이 모금액으로 빈민들이 무사히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쌀 배급과 급식, 그리고 숙소를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구세군은 해마다 12월이면 전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자선냄비 모금운동을 실시하게 되었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모금의 대명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 현재 구세군의 사역

한국구세군은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목적으로 한국 국민들과 함께 굴곡이 많았던 역사현장에 늘 함께 있었으며, 그 안에서 고통당하는 국민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영혼과 삶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회 중 가장 신뢰받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한국구세군은 사회 속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회복지 사업과 더불어 성경의 말씀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전도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한국 구세군의 역사는 다음 권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함께 나눌 문제

1. 구세군의 창립자는 누구인가요?

2. 구세군이 창립되기 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활동을 했나요?

3. 구세군으로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날은 언제인가요?

4. 구세군이 태동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5. 초창기 구세군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어디인가요?

6. 초창기 구세군이 주로 활동한 지역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7. 구세군의 선교 방식은 무엇인가요?

8. 구세군이 다른 기독교 교파와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9. 조선에 구세군이 선교되었을 때 단기간에 크게 성장한 요인은 무엇인가요?

10. 오늘날 한국 국민들이 구세군을 신뢰하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